[라이프] '가스 밸브 잘 잠갔나' 이 생각 계속 떠오른다면…강박증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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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적 사고·행동 보이는 정신질환
오염·확인·정렬 등 강박 유형 다양
시간·에너지 소모, 일상생활 어려워
약물·인지행동치료 병행이 효과적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길 만큼 강박적 사고나 행동이 반복되면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미지출처: Gettyimagesbank
아침 일찍 현관문을 닫고 돌아선 오선희(가명·42)씨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집으로 향했다. 문이 제대로 잠긴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이 느껴져서다. 가스 밸브와 전기 코드를 확인하고도 돌아보기를 수차례. 오씨는 매일 출근길마다 이런 일로 20분씩 허비하는 날이 잦다.
영화 속에서도 종종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컬슨)은 문을 닫을 때 꼭 다섯 번을 세며 잠근다. 전등 스위치도 여러 번 켰다 끄길 반복한다. ‘에비에이터’의 주인공 하워드 휴스(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피가 날 때까지 손을 반복적으로 씻는다. 공용 화장실 손잡이는 더러워서 만지지도 못하고, 모든 물건을 티슈로 싸서 집어 든다. 오씨와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이런 행동은 모두 ‘강박장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심해지면 우울증·대인기피증 생겨
강박장애는 반복적인 ‘강박사고’와 ‘강박 행동’을 보이는 정신 질환이다. 원치 않는 생각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고(강박사고), 이로 인한 불안을 잠재우려는 행동(강박 행동)이 뒤따른다. 강박장애는 의지와 관계없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뇌의 딸꾹질’이라고도 부른다.
강박 증상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흔한 유형은 ‘오염·세척 강박’이다. 이들은 청결한 상태임에도 더럽다고 여겨 자신의 몸을 자주, 오랫동안 씻는다. 둘째는 확인 강박이다. 가스 밸브는 잘 잠갔는지, 문단속이 의심돼 계속 점검하며 확인하는 경우다. 불이 날까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 가스 밸브를 수차례 살피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다. 결국 불안은 커지고 행동은 더 강화된다. 전체 강박장애 환자의 절반 이상은 오염·세척 강박과 확인 강박 유형을 경험한다.
셋째는 대칭·정렬 강박이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이들은 물건의 배열과 각도에 집착한다. 물건이 삐뚤어져 있거나 각이 맞지 않으면 불안하고, 다시 가지런히 놓아야 안심한다. 넷째는 저장 강박이다. 귀한 물건을 수집하기보다 쓸모없는 물건까지 끝없이 쌓아두는 상태다. 언젠가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쓰레기도 아까워 버리지 못한다. 이외에도 반복적으로 특정 숫자를 세거나 폭력적·성적인 상상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강박 증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흔히 강박은 완벽주의로 포장되기도 한다. 꼼꼼하게 파일을 확인하거나 물건을 정돈하는 성향은 오히려 실수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완성된 보고서를 여러 번 검토하는 A씨, 업무 파일을 각 잡아 깔끔하게 정리하는 B씨가 그렇다. 누구에게나 강박적인 면이 있을 수 있다. 자기 관리를 완벽하게 하는 사람을 두고 강박장애로 진단하진 않는다.
문제는 지속 시간과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다. ▶하루 1시간 이상 강박적 사고나 행동에 매달리거나 ▶사회적·직업적 기능 등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긴다면 강박장애 진단 대상이 된다. 강박 행동 때문에 자주 약속을 놓치고, 업무 수행에 문제가 생길 정도라면 치료가 필요하다. 강박 증상이 심해지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대인기피증까지 동반되기 쉽다.
강박장애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뇌 신경 회로의 이상과 세로토닌 불균형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뇌에 있는 정보 처리 경로가 고장 나 불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약 2%의 인구가 강박장애를 앓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박장애가 단순한 성격 특성이 아닌 치료가 필요한 질환임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료는 약물과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약물은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주로 사용한다. 불안을 줄이고 강박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치료제다.
강박 성향 있다고 모두 강박장애는 아냐
인지행동치료에선 불안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노출 및 반응 방지법’(ERP)이 핵심이다. 불안을 유발하는 자극에 점진적으로 노출한 뒤 강박 행동을 하지 않도록 훈련한다. 예컨대 손 씻기를 반복하는 환자는 처음 1분 참기를 시도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3분, 5분으로 늘려간다. 물건 정리 강박이 있다면 일부러 정렬을 어긋나게 배치한 채 그대로 두는 연습을 이어간다. “지금 떠오르는 건 생각일 뿐, 실제로 위험하지 않다”는 점을 말하며 인식하는 학습도 이뤄진다.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불안은 늘 존재하는 감정이라는 사실만 인정해도 강박 증상이 완화될 수 있다. 적정 강도의 유산소 운동과 명상은 강박 증상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당장 주어진 일에 집중하면서 이완 요법과 복식호흡을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 좋다. 강박 증상으로 일상생활이 힘들어진다면 망설이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도움말=이정석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지원 순천향대 부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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