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날 정치 아닌 자유 쪽으로 이끈 말 “I will not serve” [왕겅우 회고록-청년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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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ill not serve.” 자유의 즐거움을 문학에서 찾다.

교수들은 영국 학생들에게 베풀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그분들 기준으로 최고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베풀었다. 문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려 애쓰기도 했다. 우리 문예잡지 〈새 용광로(The New Cauldron)〉를 만들도록 이끌어주었다.

남들에게는 공상의 세계로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의 세계가 있었다. 우리는 장래의 말라야 문학이 어떤 것이 될지 생각하며 미래 세대의 교육에 대한 그 문학의 공헌을 상상하는 글을 썼다. 중국인, 말레이인과 인도인이 소통할 수 있는 공용어가 형성될 가능성을 내다보기도 했다. 국가의 성격이 아직 불확실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것을 더 확실하게 만드는 데 문학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우리 노력이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열중했다.

이제 돌아보면 우리 교육에 너무 큰 빈틈이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지중해세계의 고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후세 문학의 이해에 깊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영국 일류학교 학생들만큼 그 언어를 깊이 알지 못해서 시 작품의 미묘한 맛을 놓치기 쉬웠다. 현대 유럽에 한정된 것이라도 비교문학 같은 분야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난징에서 외국어학과에 다닐 때는 영어 전공자도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무엇을 읽는지 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현대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도 유럽 고전을 번역판으로 많이 읽고 있었다. 그런 폭넓은 섭렵을 통해 상상력이 키워지고 자기네 문학 전통에 대한 통찰력이 함양되는 것을 나는 실감했다.

경제학과 역사학도 함께 공부하고 있었으나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제일 깊었고, 2학년 때 새로 온 교수 한 분 때문에 더 증폭되었다. 패트릭 앤더슨 교수는 특이한 배경의 인물이었다. 교육자 이전에 실천가였다. 옥스퍼드 학생회 대표를 지냈고 캐나다의 문예잡지 〈프리뷰(Preview)〉를 창간한 시인인데, 사회주의 좌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앤더슨 교수가 소개해 준 기욤 아폴리네르가 매우 흥미로웠고, 그 작품을 읽으며 샤를 보들레르, 폴 발레리와 아르튀르 랭보를 만나게 되었다. 화가, 음악가, 시인으로 이뤄진 그들의 놀라운 세계에 접하며 나는 파리와 관계된 모든 것에 꽂혀버렸다. 헨리 제임스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 도시에서 영감을 받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도 그곳에서 더블린에 관해 쓰고 〈율리시즈〉를 완성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내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지울 수 없는 감명을 받은 것은 앤더슨 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

“I will not serve.”란 말을 처음 읽을 때는 무심히 지나갔다. 그런데 그 말이 내 가슴에 박혀서 일체의 공직을 외면하게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몇 해 지난 후에 들었다. 무의식중에라도 아버지와 조상들이 심어준 가치관에서 내가 물러서는 첫걸음이었다. 이 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치를 멀리하고 자유를 많이 누리는 쪽으로 나를 이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치적 변화에 적응하는 내 노력의 일부로 영문학의 또 한 측면이 들어왔다. 나는 학생회 활동이 많아졌고 반-식민 경향 활동에도 참여가 늘어났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도 포함된 것이었다. 내 경우는 영국노동당 식 사회주의에 끌리고 있었다. 폭력의 거부와 자유의 증진을 기조로 하는 운동이었다. “I will not serve.”라는 말처럼, 계몽된 서양이 옹호하는 문학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이는 사고방식이었다.

2학년이 끝날 무렵에 결정을 내렸다. 문학 사랑이 여전하고 시 쓰기를 계속하고는 있어도 문학도가 되지는 않기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나니 나머지 두 분야 중 어느 쪽을 일반학위의 방향으로 잡을지 골라야 했다. 그 무렵에는 학생회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내가 속하고자 하는 말라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중에 적겠다.

새 나라의 민족문학을 영어로 써도 되나?

베다가 내 시를 출판할 때 친구들이 대개 신통치 않게 여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인 교수 중에 내 시작(詩作) 실험을 계속하도록 격려해 준 분들이 있었던 것은 뜻밖이었다. 더 뜻밖의 일은 마닐라의 청년작가 심포지엄에 초대받은 것이다. 어떻게 초대장을 받게 된 것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조직자들이 내 시집을 보도한 신문을 보고 내게 좋은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록펠러재단에서 보낸 초대장이었다. 그 재단은 동남아시아 청년 작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미국 소설가 월리스 스테그너에게 “극동 작가들”에게 가르침을 베풀도록 부탁했다. 재단은 그를 필리핀대학(UP)으로 보냈는데, 그곳에는 유명한 필리핀인 단편 작가이자 영문학 교수 N.V.M. 곤살레스가 학생과 젊은 작가들을 위한 작가 워크숍을 시작해 놓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여기 적는 것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를 알게 된 첫 기회였을 뿐 아니라 민족문학의 의미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배울 기회였기 때문이다.

영문 작품활동을 진흥하자는 록펠러재단의 목적은 취지는 좋아도 상황에 맞지 않았다. 영어가 별로 쓰이지 않던 지역이었다. 영어로 대학교육을 시행하는 곳은 버마와 말라야뿐이었는데, 1950년 당시에 독립 버마는 영국을 등지고 있었고 말라야의 대학은 세워진 지 1년밖에 안 되었다. 어느 쪽에도 영문 작품활동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영어로 시를 쓰려 하던 나 같은 초보 시인이 그 워크숍의 혜택을 받을 만한 극소수 참가자의 하나였다.

참가자 대부분은 필리핀대학 학생들이었다. 스테그너는 청중의 기대에 맞춰 자신의 글쓰기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단편소설에 대한 곤살레스의 열정이 인상적이었다. 케서린 앤 포터를 매우 존경하는 그는 우리에게 포터처럼 원고를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쓰고 쓰고 고쳐 쓸 것을 권했다. 그 주일의 나머지 시간은 곤살레스의 동료 버지니아 모레노와 함께했다. 모레노는 젊은 시인들에게 영어로 시 쓰는 길을 가르쳐주는 역할이었다. 말레이인, 스페인인과 중국인 조상을 두루 가진 모레노를 보며 동남아시아 사회에 널리 나타나는 문화적 복층(複層) 현상을 떠올렸다. 지역 사회들의 모습을 빚어내는 국지적 성향과 보편적 성향의 엇갈림을 강렬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모레노의 제자 몇 사람과 친구가 되어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 친구들에게 느낀 민족적 자각의 흥분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말라야 사람들보다 몇 해 앞선 것이었다. 자기네 나라의 장래에 관한 그들의 토론을 들으면서 레나토 콘스탄티노와 테오도로 아곤칠로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스페인과 미국의 지배를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연계된 민족주의 운동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이었다. 말라야공산당에 민족주의자들도 있어서 무조건 적대할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워크숍 동안 중국 이름을 가진 필리핀대학 학생 둘을 더 만났다. 중국에서 공부한 일이 있는 내가 영어로 글을 쓰는 이유를 그들은 궁금해했다. 글쓰기 공부일 뿐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새로운 국가정체성의 표명에 외국어를 쓴다는 것이 엉뚱한 짓 아닌가, 떠오르기 시작한 의혹 때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그 친구들도 미심쩍은 눈치였다. 한 친구가 참 우스운 일이라고 말했다. 3백년 동안 쓰던 한 정복자의 언어를 내다버리고 50년 전에 들어온 새 정복자의 언어로 바꾼다는 것이.

여기서 또 하나 질문이 떠올랐다. 독자적 정체성을 발판으로 한 국가 건설의 열기 속에 중국인의 자리는 어디인가? 영문학도 입장에서는 의미 없는 질문으로 생각되었다. 영어를 잘 배워 그 문학적 성취를 음미하고 내 하고 싶은 말을 표출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내 할 일이었다. 주어진 나라에서 2등 국민으로 자리 잡으려고 애쓰는 수많은 중국인의 장래가 걸려있는 핵심적 질문이라는 사실은 후일에야 깨닫게 되었다.

국적만 딴다고 말라야 사람이 될 수 있나?

마닐라 워크숍을 통해 20세기 초부터 각자의 민족문학을 생산해 온 작가들에 관해 더 알게 되었다. 그 작가들이 민족의 자기발견에 공헌해 왔다는 생각에 나는 끌렸다. 남양 화교에게 영향을 끼친 5-4 시기 중국문학이 생각났다. 말라야에는 중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작가들이 많았다. 위다푸(郁達夫)처럼  싱가포르로 오기 전에 이미 명성을 쌓아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잠깐 교사로 지내고 그곳 아이들을 그린 중편 〈샤오보의 생일〉을 쓴 소설가 라오서(老舍, 쉬칭춘(舒慶春, 1899–1966)의 필명)는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47년 중국으로 갈 때까지 지역의 중국어 작품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조금 읽어보고 창의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49년 싱가포르에 가서 영어로 된 말라야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친구들의 토론을 들을 때도 중국어 작품을 말라야문학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말레이어 작품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인도네시아 문학의 한 분파일 뿐이지 진정한 “말라야”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새 나라의 국가정체성에 믿음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의 연설에는 그 믿음이 열정적인 언어로 그려졌다. 대다수 자바인이 쓰던 언어를 국어로 삼지 않은 것이 재미있는 일이다. 모든 항구도시에서 널리 쓰이는 말레이어를 열도의 공용어로 지정한 네덜란드인의 뒤를 그대로 따랐다. 모든 사람에게 사용이 편리한 비즈니스용 언어였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하나의 공용어를 가진 것은 그들의 행운이었다.

수십 개 토착어를 가진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미국 점령 후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바꿨다. 미국인은 새 식민지에 공립학교 시스템을 도입하고 지역 대학들이 영어로 바꾸게 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타갈로그어 민족문학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새 세대는 영어에 끌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여기서 민족에 관한 더 많은 의문을 느꼈다. 우리가 “말라야”의 것으로 생각하던 것들을 되짚어보았다. 내 시 쓰기도 일종의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말라야 문학이 영어를 발판으로 일어난다면 내 노력에 계속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상황은 급하게 바뀌고 있었고 나는 두 가지 다른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내가 어떻게 말라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불과 몇 달 전까지 나는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국인이었다. 말라야는 내가 떠난 곳이었고 그리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직장 때문일 뿐이었다. 바하사 인도네시아를 알게 되고 타갈로그어의 공인 요구를 알게 되면서 조상들의 언어와 나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이포에나 이제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있던 싱가포르에나 말라야를 자기 나라로 삼는 많은 아이들이 중국인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새 국어를 정하는 데 영어가 한 몫 맡는 것을 그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또 하나, 영어라면 어떤 영어가 쓰일 것인가? 법률과 행정에 계속 쓰일 수 있고, 현대사회에 필요한 사업과 기술 분야에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민족어”는 될 수 없다. 십여 년 후 싱가포르가 말라야-말레이시아에서 떨어져 나갈 때 또 한 차례 반전이 일어난다. 젊은 싱가포르인들이 영어를 국어로 선택할 것을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다.

왜 중국어로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중국인 독자들을 위해서라면 중국어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영문학도로서 그 언어에 내 목소리를 담을 수 있을지 궁금하던 학생이었다. 후에 중국어로 시 몇 편을 써보기도 했고 1953년 학교에 말레이학과가 만들어졌을 때는 말레이어를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고 유명한 말레이학 연구자 자이날 아비딘 빈 아흐마드 교수의 강의도 들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역사학 전공을 결정하고 있어서 말레이어 공부는 `50세대 작품 감상이 아니라 연구 문헌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국어가 그 나라의 토착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면 엥말친[Engmalchin: 영어, 말레이어, 중국어를 버무려 말라야 화교들이 쓰던 말] 같은 말을 배우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몇 편 시를 더 쓰면서 의혹이 짙어지기만 했다. 결국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중단했다. 내가 시인의 자격에 자신감을 잃기 시작한 계기가 마닐라 여행에 있지 않았나 생각하곤 했다.

말라야 문학이 말레이어나 중국어 같은 다른 모국어로 더 잘 표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작가들을 계속해서 관찰해 왔다. 그 무렵 시단에 떠오른 샛별이 있었다. 웡푸이남[Wong Phui Nam 黃佩南; 1935 – 2022, 말레이시아의 경제학자이자 시인]은 고매하고 야심찬 작품들을 내고 있었다. 중국계 작가들이 2차대전 훨씬 전부터 “말라야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 이후 수십 년간의 문학적 성과와 함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여러 세대 작가들이 각자 자기네의 특이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방언을 구사한 말라야의 창작 양식의 존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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