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비행기는 일등석만, 혼외자까지…두 얼굴의 민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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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의 아메리칸 오딧세이] 지난달 타계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 두 얼굴
1968년 멤피스의 모텔 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제시 잭슨(왼쪽 둘째)이 담소하는 장면. 킹 목사 암살 전날 촬영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기록은 역사를 남기지만, 기억은 종종 신화를 낳는다. 잘못 끼워 맞춰진 기억일수록 그렇다. 지난달 타계한 제시 잭슨도 그런 사례다. 그는 마틴 루터 킹(1929~68)의 뒤를 이은 흑인 지도자이자 민권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의 삶은 영웅 서사와 논쟁적 기록이 혼재돼 있다.
그의 업적을 나열하는 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다. 1948~98년에 걸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는 갤럽의 연례조사에서 그는 톱10에 11번 들어갔다. 알버트 슈바이쳐, 헨리 키신저와 동률이다.
그가 최초의 흑인 대선후보는 아니었지만, 존재감을 보여준 최초의 주자였다. 1984년 첫 출마 때 민주당 경선에서 18%를 득표해 월터 먼데일과 게리 하트에 이어 3위에 올랐다. 두 번째엔 성적이 더 좋았다. 1988년 경선에서 29.3%를 얻어 마이클 두카키스(41.8%)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2000년 대선에 출마한 앨 고어(13.7%)의 배 이상이었다. 보수주의가 만개하던 1980년대에 흑인이 대선에 도전한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였다.
미국 정치사에서 그의 결정적 공로를 꼽자면, 흑인 정치운동에 백인 진보층을 끌어들여 외연을 넓혔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훗날 버락 오바마가 나오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2008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오바마의 당선을 이렇게 풀이했다. “타이밍이지. 오바마는 60년에 걸친 레이스의 마지막 바퀴를 뛴 셈이요.”
미국서 존경받는 인물 톱10에 11차례 선정
지난 6일 시카고의 ‘희망의 집’ 교회에서 거행된 제시 잭슨 목사의 장례예배. 클린턴·오바마·바이든 전 대통령이 연단에 올라 일제히 트럼프를 공격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는 연설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1984년 7월 17일 전당대회 연설은 일생 최고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그의 인간적 면모가 잘 드러난 대목이 있다.
“제 머리는 한계를 지녔으나, 제 마음은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저는 완벽한 종이 아닙니다. 저는 역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봉사하려는 공복일 뿐입니다. 제가 성장해 섬길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하나님은 아직 저를 완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약 50분의 연설 중 초반 8분께 나오는 말이다. 완벽한 종이 아니라는 부분에선 말을 더듬었다. 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청중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모자람을 솔직히 드러낸,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때론 흑인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며 쓴소리도 마다치 않았다. 1993년 흑인 갱단 탓에 시카고의 치안이 나빠졌을 때다. “길을 걷다가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순간 강도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뒤돌아보게 되는데, 백인이면 마음이 놓입디다. 제겐 이게 가장 뼈아픈 일입니다.” 잭슨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돌이켜 보면, 성경 말씀처럼 그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했다. 민권운동에 합류하기 전 그는 시카고의 갱단 간부와 어울렸다는 기록이 있다. 스스로 빈민가 출신이었다고 했지만, 양아버지는 우체국 공무원이었고 모친은 미용사였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는 1968년 킹 목사가 숨을 거둘 때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곁을 지킨 인물로 보도됐다. 실제 암살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킹 목사의 마지막을 지킨 이는 랄프 애버내시(1926~90) 목사였다. 총성이 울리던 순간 잭슨은 다른 방에 있었다. 또 동료들이 모두 멤피스에서 애도하는 동안, 잭슨은 혼자 시카고로 날아가 피 묻은 스웨터를 입고 TV 인터뷰에 응했다. 검증 없이 잭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기사들이 나왔다. 이에 킹 목사의 측근들은 격분했고, 그의 부인 코레타는 몇 년간 잭슨과 말을 섞지 않았다.
당시 그는 신학대를 중퇴한 탓에 목사가 아니었는데도 목사로 통했다. TV에 출연한 지 몇 달 뒤 목사였던 친구 클레이 에반스에 부탁해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 예배를 받았다. 목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했다는 기록은 없다.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와 달리, 세속의 목사는 늘 높은 곳을 향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연단과, 그 뒤편에 조용히 차려진 협상 테이블까지…. 잭슨은 비행기를 타면 꼭 일등석에 앉았다. 차를 탈 땐 단정한 유니폼과 흰색 장갑을 낀 기사가 모는 리무진을 선호했다. 호텔에선 널찍한 스위트룸에 묵었다. 공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애들은 엘리트 사립학교에 보냈다.
호사를 누린다는 건 돈에 불편함이 없다는 뜻이다. 1980년대부터 잭슨의 사업 수완은 빛을 발했다. 소수계를 위한 카터 정부의 공공조달 할당제가 민주당 인맥이 좋은 잭슨에게 멍석을 깔아줬다. 그의 이복동생 노아 로빈슨이 굵직한 정부 계약을 따낸 뒤 백인 기업들에 하청을 줘 돈을 벌었다.
잭슨은 기업에도 접근했다. 매출의 일정 부분을 흑인 소비자에게 거두는 기업은 하청·광고·금융거래·채용 등 모든 분야에서 같은 비율로 흑인에게 할당해야 한다는 식이다. 응하지 않으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며 압박했다.
표적이 된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1980년 버드와이저 맥주로 유명한 안호이저부시가 불매운동 위협을 받았다. 잭슨과 협상해 시카고의 유통망 하나를 흑인 업체에 매각하는 데 합의했다. 인수자는 잭슨의 아들 유세프와 조너던이 참여한 투자회사였다. 여론으로 기업을 코너에 몰아넣고 문 닫힌 방 안에서 거래를 마무리하는 전술이었다.
코카콜라도 비슷한 압박을 받았다. 1981년 잭슨은 코카콜라의 남아공 사업을 문제 삼았다. 인종차별 국가에서 돈 버는 건 그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주장이었다. 코카콜라는 콜라 원액의 유통권 일부를 흑인에게 주는 선에서 수습했다. 소수 인수자 중엔 잭슨의 이복동생 로빈슨이 있었다. 연간 1000만~3000만 달러 규모의 사업이었다.
이듬해엔 켄터키 프라이드치킨(KFC)의 운영사 휴블라인을 얼러댔다. 흑인 상대로 돈 벌면서 흑인을 많이 쓰지도 않고, 흑인 점주를 두지도 않는다고 비난했다. 곧 KFC의 흑인 프랜차이즈가 확대됐는데, 이번에도 다수가 로빈슨의 수중에 떨어졌다. 얼마나 돈벼락을 맞았는지 “이러다 곧 록펠러 집안과 맞먹겠는걸”이라는 그의 발언이 지역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로빈슨은 1989년 청부살인 혐의로 체포돼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 2022년 고령(80)으로 감형받아 풀려났다.
1990년대 클린턴 정부에선 대규모 인수합병(M&A)에 개입했다. 시민단체의 지지가 규제 당국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1998년 씨티와 트래블러스의 합병에 대해 여러 소비자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지지했다. 트래블러스의 최고경영자 샌디 웨일스는 10만 달러, 씨티는 5만 달러를 잭슨과 그의 단체에 각각 기부했다.
이어 통신업계의 대형 M&A에도 끼어들었다. SBC와 아메리테크의 합병(1999), 벨과 GTE의 합병을 통한 버라이즌의 탄생(2000)에도 입김을 행사했다. 각각 적게는 50만 달러, 많게는 100만 달러의 기부금이 합병 이후 답지했다.
대가성 거래 의혹과 기부 압박, 그리고 불투명한 회계는 도마 위에 자주 올랐다. 그때마다 잭슨은 역공에 나섰다. 같은 흑인이 비판하면 배신자, 백인이 하면 인종차별 프레임으로 되받아쳤다.
이처럼 그는 인종 문제를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활용할 줄 알았다. 이를 통해 대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방식의 인종정치 모델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민권 운동가로 추앙받으면서도 인종 갈등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의 흑인 경제력 신장 운동이 빈곤층보다 자신과 측근에게 먼저 혜택을 줬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어떤 무대에도 결국 조명이 꺼지는 순간은 온다. 잭슨은 2001년 1월 여성 보좌관 카린 스탠퍼드와의 사이에 혼외자식을 둔 게 들통나면서 급속히 영향력을 잃었다. 임신한 스탠퍼드를 백악관으로 데려가 클린턴에게 소개하며 찍은 사진까지 공개돼 두고두고 입방아에 올랐다. 여기에 양육비를 재단 기부금에서 지급했다는 의혹이 겹쳐 그의 이미지는 만회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2001년 ‘혼외자식’ 스캔들로 영향력 잃어
제시 잭슨 목사 추모집회에 참여자들이 존경의 표시를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AP=연합뉴스]
오바마 시대 이후엔 잭슨의 존재감이 더 위축됐다. 스캔들 탓도 컸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벌였던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이젠 굳이 잭슨이 필요치 않은 시대가 됐다. 그의 정체성 정치는 민주당 좌파의 의제로 굳어졌다. 또 장강의 앞 물결이 뒷물결에 밀려나듯, 흑인 운동의 주도권도 BLM(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이 소중하다)에 내줬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 피살 직후 1년 만에BLM이 받은 기부금 9000만 달러는 잭슨이 평생 거둬들인 액수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말년엔 파킨슨병에 시달렸다. 타계 직후 유족은 연방의회에 빈소 설치를 희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사당 빈소는 전직 대통령의 예우 차원에서 마련되곤 했다. 공화당의 딕 체니 전 부통령, 보수 청년 운동가 찰리 커크의 장례 때도 같은 요청이 반려됐으니, 잭슨에 대한 푸대접으로 보긴 어렵다.
영웅을 굳이 완벽한 존재로 만들 필요는 없다. 결점과 업적을 함께 봐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마오쩌둥을 두고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 하듯, 잭슨 역시 공과 과를 함께 저울에 올려놓을 때 비로소 진면목이 보이지 않을까.
◆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가 현지에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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