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재정의한 발렌티노의 로마적 럭셔리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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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아닌 로마. 장소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이탈리아 럭셔리 패션 브랜드 발렌티노 이야기다. 그동안 파리 패션위크를 주 무대로 삼아왔던 발렌티노가 본거지인 로마로 장소를 옮긴 결정은 패션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례적인 행보였다. 많은 의미를 담은 발렌티노의 로마 쇼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 3월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발렌티노 2026 가을겨울 컬렉션 쇼. 사진 발렌티노
지난 3월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발렌티노(Valentino)의 올해 가을·겨울 컬렉션 쇼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이번 쇼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선보이는 네 번째 메인 컬렉션이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 패션위크 취재를 끝낸 전 세계 기자들과 셀럽들, 패션업계 관계자들이 로마로 날아갔다. 마음속엔 ‘왜 로마지?’란 의문을 품고서.
하지만 로마에 도착한 순간 그 의문은 저절로 풀렸다. 로마는 발렌티노가 설립된 하우스의 본고장이다. 본사 역시 설립 이후 지금까지 로마 중심부에 있다. 게다가 미켈레 역시 로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미켈레는 이번 쇼의 개최 도시를 로마로 변경하며 역사적 뿌리가 내린 도시에서 브랜드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전략을 선택했다.
로마 개최의 배경에는 올해 초 93세를 일기로 타계한 창립자 발렌티노 가라바니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깊게 투영됐다. 가라바니가 생전 일하고 사랑하며 숨을 거둔 로마를 쇼 장소로 낙점한 것은, 그에게 바치는 미켈레의 헌사인 셈이다.
간섭과 충돌이 만들어낸 새로운 우주
미켈레는 이번 컬렉션을 ‘인터페렌체(INTERFERENZE)’라 이름 붙였다. ‘간섭’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규율과 자유, 구조와 움직임처럼 서로 상반된 개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섭이란 개념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발렌티노의 유산 위에 자신의 미학을 겹쳐 놓으려는 미켈레의 작업 방식과도 연결되는 개념이다. 컬렉션은 발렌티노의 역사와 미켈레의 감각, 두 개의 미학이 충돌하고 겹쳐지며 하나의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냈다.
두 명의 건축가가 두 개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팔라초 바르베리니의 계단을 발렌티노 레드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걷고 있다. 사진 발렌티노
그는 이 개념을 공간에서 먼저 끌어왔다. 쇼가 열린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는 고대 로마 역사와 바로크 시대의 화려함이 공존하는 성이다. 미켈레는 이곳을 발렌티노의 유산과 현대적 변주가 충돌하고 화해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특히 두 명의 바로크 건축의 거장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각각 설계한 두 개의 계단은 미켈레가 표현하고 싶은 ‘간섭과 충돌’이란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줬다. 한쪽 계단은 곡선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구조, 다른 한쪽은 이성적 질서가 강조된 수직적 구조로, 미켈레는 서로 다른 건축 언어가 한 공간 안에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에 주목했다. 그는 쇼가 끝난 후 가진 프레스 모먼트에서 이에 대해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긴장과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내가 하는 작업과 같다”고 설명했다.
간섭은 컬렉션 의상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교하게 재단된 테일러링 재킷·코트 위에 과장된 볼륨과 장식을 덧입히고, 절제된 실루엣과 장식적인 요소가 한 몸처럼 결합했다. 완성된 질서 위에 또 다른 질서가 간섭하고 충돌하면서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번 발렌티노 2026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놀라운 드레이핑과 바로크적 디테일 등 발렌티노의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유산을 새로운 스타일로 만들어 선보였다. 사진 발렌티노
드레이핑과 레이스가 돋보이는 이브닝 드레스들. 사진 발렌티노
화려한 화이트 퍼 코트에 레이스 랩 스커트와 록스터드 사진 발렌티노
발렌티노 2026 가을겨울 컬렉션. 사진 발렌티노
1980년대, 여성의 힘과 몸의 재해석
이번 컬렉션은 1980년대 로마가 지녔던 긍정적 에너지와 문화적 풍요를 현재로 끌어왔다. 미켈레는 이 시기를 “빛나는 것들의 시대“로 정의하며,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와 신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던 순간에 주목했다.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는 실루엣이다. 넓고 둥글게 강조된 어깨 라인의 재킷과 코트는 권위와 힘을 드러낸다. 동시에 허리 아래로 흐르는 드레이핑(주름)은 유연한 곡선을 만들며 여성성을 강조한다. 구조적 강인함과 유동적인 부드러움이 한 룩 안에서 공존하는 방식이다.
소재와 디테일에서도 이중성은 반복된다. 속이 비치는 레이스 팬츠와 랩 스커트, 재킷 안에 레이어드된 시스루 톱은 관능적인 긴장을 만든다. 레이스 밑단이 더해진 청바지는 캐주얼한 아이템에 쿠튀르적인 섬세함을 결합한 사례다. 여기에 바로크풍의 과감한 주얼리가 더해지며 전체적인 인상을 극대화한다.
여성성에 대한 해석에는 개인적 서사도 반영됐다. 미켈레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자신의 몸과 존재를 인식하고 통제하는 여성상을 이번 컬렉션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구축했던 ‘여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옷’이라는 개념을 미켈레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창립자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상징과도 같은 '발렌티노 레드' 드레스를 컬렉션 쇼의 마지막 작품으로 내세웠다. 사진 발렌티노
쇼는 ‘발렌티노 레드’ 드레스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하우스의 상징적 컬러와 바닥을 끄는 실루엣이라는 전통적 코드 위에, 어깨부터 엉덩이 뼈까지 깊게 파인 V자 컷아웃이 더해진 드레스는 발렌티노 가라바니에 대한 오마주가 분명했다. 한편 이번 쇼에는 배우 고현정을 포함해 글로벌 앰배서더인 배우 콜맨 도밍고와 기네스 팰트로, 가수 타일라, 태국 배우 프린 사로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More is More! 많을수록 좋다.
미켈레의 천재성은 맥시멀리즘에서 꽃을 피운다. 발렌티노의 상징 락스터드의 부활과 커머번드의 파격적 변주, 정교한 드레이핑이 어우러진 이번 컬렉션은 곳곳에 하우스의 정체성을 새기며 풍요로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컬렉션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번 컬렉션에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 락스터드. 락스터드가 돌아왔다. 사진 발렌티노
▶락스터드의 화려한 복귀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받은 요소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발렌티노의 상징 ‘락스터드(Rockstud)’다. 뾰족한 스터드 장식은 구두뿐 아니라 가방 전면에도 적극적으로 배치되며 하우스의 아이코닉한 코드를 다시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과거의 상징을 현재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미켈레 특유의 집요한 접근이 드러난다.
남성 예복 허리띠로 사용되는 커머번드는 남성복과 여성복 모두에 다양한 스타일로 쓰였다. 사진 발렌티노
▶커머번드의 놀라운 변주
전형적인 남성 예복 요소였던 ‘커머번드(Cummerbund)’는 이번 시즌 가장 흥미로운 디테일 중 하나다. 부드러운 새틴 소재의 허리띠로 재해석돼 여성복과 남성복을 가로지르며 활용됐다. 특히 다층의 주름을 접어 봉제한 구조는 장인정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실루엣을 조형적으로 정리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나비가 새겨진 이번 시즌 스니커즈. 사진 발렌티노
▶곳곳에서 포착된 나비의 서정성
나비 모티브는 이번 컬렉션의 감정선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스니커즈에는 자수로, 가방에는 스팽글 장식으로 등장하며 다양한 형태로 변주됐다. 주얼리 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작은 나비 펜던트 목걸이를 정면으로 착용해 가슴에 포인트를 주거나, 등을 드러낸 드레스에는 목걸이를 뒤로 돌려 펜던트가 등에 위치하도록 연출했다. 장식이 신체의 움직임과 함께 서사를 만드는 방식이다.
물 흐르는 듯한 드레이핑으로 완성된 우아한 드레스들. 사진 발렌티노
▶경지에 달한 드레이핑
드레이핑은 이번 컬렉션에서 하나의 구조로 기능한다. 여성복뿐 아니라 남성복에서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주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주름이 모이는 지점을 비틀고 꼬아 고정하는 방식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형태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유동성과 구조가 동시에 구현된 미켈레식 드레이핑이다.
과감한 크기와 색으로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주는 바로크풍 주얼리. 사진 발렌티노
▶레이스와 바로크 주얼리의 존재감
레이스와 주얼리는 이번 시즌 맥시멀리즘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다. 속이 비치는 레이스 팬츠와 랩 스커트, 재킷 안에 레이어드된 시스루 톱은 관능적인 긴장을 형성한다. 여기에 더해진 바로크풍 주얼리는 룩의 밀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오버사이즈 목걸이와 귀걸이, 브로치 장식은 팔라초 바르베리니의 장식적 공간과 공명하며 시각적 무게감을 더한다.
올봄부터 가을겨울 컬렉션까지 가장 중요한 가방 중 하나인 발렌티노 가라바니 판테아 백. 사진 발렌티노
▶발렌티노 가라바니 판테아 백의 향연
이번 쇼의 스타를 꼽자면 ‘발렌티노 가라바니 판테아 백’ 이다. 메종의 아이코닉 백인 판테아 백은 고대 신전을 연상시키는 구조적인 형태가 특징이다. 서로 다른 질감의 가죽 패널을 연결해 하우스를 상징하는 쉐브론 패턴을 구현했고, 고양이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금속 모티브는 가방을 하나의 조형 오브제로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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