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년중앙] 1950년 6월 25일, 그 후 75년…희생으로 지켜낸 평화의 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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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여중전투…백마고지전투…
한반도 너머 세계 평화 위한 희생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인 38선 전역을 기습 남침하며 6·25 한국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유엔군으로 파병된 16개국과 의료지원 6개국 등 총 22개국 195만7816명이 남한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죠. 이토록 많은 이들이 참전, 희생을 치른 전쟁은 사실 완벽하게 종전되지 않았습니다. 휴전협정을 맺은 지 70여 년, 우리나라는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휴전 국가로 남아있죠.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고자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찾아 6·25전쟁에 대해 들여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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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솔·박건우·박준후 학생기자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고자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방문했다.

75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6·25전쟁은 본격적인 냉전 시대의 막을 연 전쟁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갈라진 공산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 간의 정치·외교·이념상의 갈등 및 군사적 위협의 잠재적인 권력투쟁을 의미해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통계로 본 6·25전쟁』에 따르면 3년간 지속한 이 전쟁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을 포함해 77만여 명이 전사·부상·실종됐고 한국인 민간인 피해자는 사망자 24만여 명, 부상자 22만여 명, 실종자 30만여 명으로 총 99만여 명에 달합니다. 또 국토의 3분의 1이 초토화되고 이재민이 1000만 명을 넘을 정도로 그 상처는 매우 컸죠.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지만, 한국은 포기하지 않고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며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

전쟁기념관에 들어서면 저 멀리서부터 형형색색의 세계 각국의 국기가 펄럭이며 관람객들을 맞아줍니다. 2015년 유엔 창설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참전국에 감사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담아 설치한 '유엔 참전국 기념비'예요. 각각의 기념비에는 국가명, 월계관, 참전 내용, 참전용사에게 바치는 추모 글이 해당국의 언어와 한국어로 새겨졌죠. 전쟁기념관의 여러 전시실 중 한국전쟁은 6·25전쟁실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이솔·박건우·박준후 학생기자를 맞이한 전쟁기념사업회 교육운영팀 윤수정 해설사가 각각 한반도 독립과정과 북한의 전쟁 준비에 대한 기록물을 볼 수 있는 1관과 38도선 돌파 시점부터 정전협정 체결 과정을 다룬 2관으로 나뉘어 있다고 소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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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소련서 무기를 지원받은 북한군에 비해 국군은 무기가 빈약했다는 윤수정(맨 왼쪽) 해설사 설명을 듣는 소중 학생기자단.

이솔 학생기자는 관람에 앞서 "전쟁을 기념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데, 전쟁기념관을 만든 이유가 궁금해요"라고 질문했어요. 윤 해설사는 "전쟁기념관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웅을 기리는 공간이자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슬픈 일인지 알리고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의 소중함을 배우는 곳이에요. 기념은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죠"라고 설명했어요. 이어 "6·25전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아요?"라고 물었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1950년도 6월 25일 새벽이요" "북한이 먼저 침략했어요" "남침이요" 등 저마다 알고 있는 관련 정보를 쏟아냈죠.

"모두 잘 알고 있네요.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북한군이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해 발발한 전쟁이에요. 앞서 1940년부터 김일성은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할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며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해요. 그러나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중국의 공산화 등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입장을 바꾸었죠. 결국 1950년 3월 말부터 한 달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남침 전쟁을 승인했어요."

윤 해설사는 전쟁 때 남·북한군 무기를 소개하며 "어느 쪽이 북한 무기 같아요?"라고 물어봤습니다. 건우 학생기자가 "왼쪽 무기들이 더 강해 보여요"라고 답하자 그는 “당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총·전투기·전차 등 많은 무기를 받아 전투에 참여했어요. 건우 학생기자 말처럼 왼쪽이 전쟁 때 북한군이 쓴 무기들로, 이 '슈파긴' 기관단총이 위협적이었다고 해요. 원형 탄창에는 총알을 많이 넣을 수 있는데, 1분당 최대 몇 발까지 쏠 수 있었을까요?”라고 다시 질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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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개발된 소련의 PPSH-41 '슈파긴' 기관단총은 1분당 최대 900발까지 가능한 최신식 무기였다.

준후 학생기자가 "500발이요"라고 말하자 윤 해설사가 "좀 모자라요"라고 귀띔했고, 이솔 학생기자가 "1000발이요"라고 외쳤죠. "비슷해요. 1분당 최대 900발까지 쐈다고 해요. 북한에서는 이 모델을 순우리말로 다발총이라 불렀는데, 이게 살짝 변해서 여러분도 들어봤을 '따발총'이란 이름이 됐죠. 총 외에 전투기·전차 등도 엄청나게 차이 났는데, 당시 북한에는 242대의 전차가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단 한 대도 없었고요. 그야말로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의 전쟁이었던 셈이죠."

빈약한 장비로 군사력 차이가 컸던 터라 결국 북한군 공격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게 됩니다. 전투기와 T-34전차 등 최신 무기를 앞세운 집중 공격으로 서울 북쪽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서울이 함락, 한강을 넘은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했죠. 이런 상황에서 미군을 비롯해 유엔군이 합류하면서 반격에 나설 수 있었어요. "위기에 처한 국군이 여기만은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정했는데, 혹시 어딘지 아는 친구 있나요?" "낙동강이요" 준후 학생기자가 대답하자 윤 해설사는 "잘 아네요.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총 길이 24㎞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막아내며 부산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키고 이를 통해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거죠"라며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서 학도의용군이 참여한 포항여중 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고 소개했습니다. 1950년 8월, 포항여자중학교에서 벌인 이 전투는 포항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한 교전이었다고 윤 해설사는 덧붙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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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전면공격에 대비해 1950년 1월 말경 수립한 육본작전명령 38호 국군방어계획.

"학도의용군이 뭘까요?"라는 질문에 "학생군인이요"라고 이솔 학생기자가 말했어요. "맞아요, 입대할 수 없는 어린 나이의 학생들로 구성된 군대죠. 학생들이 급하게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북한군에 맞서 싸웠죠. 이들의 희생은 전쟁 내내 이어졌어요. 포항여중 전투에서도 북한군 공세를 저지한 학도의용군 활약 덕에 많은 포항시민이 형산강을 넘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때 71명의 학도의용군 중 47명이 전사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죠." 북한군 공격을 막아내고 국군 제3사단 사령부 등의 철수를 돕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 유지에 기여한 포항여중 전투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꼽혀요.

6·25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

다음으로 6·25전쟁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전투로 꼽히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봤어요. "유엔군이 전세 역전을 위해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월미도에서 기습으로 벌인 작전으로 함대 261척, 미 해병대 1개 사단과 육군 7개 사단을 비롯한 총 7만5000명의 병력이 투입됐죠.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장군이 누구죠?" 윤 해설사 질문에 "맥아더 장군이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세계 1차·2차 대전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이었죠.

"처음엔 인천상륙작전에 반대가 많았어요. 인천은 지리적으로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어려웠거든요. 미 합동참모본부와 극동 해군의 반대에도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후방을 단절시키고 서울을 단시일 내 탈환해 전세를 역전하기 위한 전략적·심리적·정치적인 이유로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승인을 받아냈죠." 9월 15일 새벽 6시 30분 월미도(녹색해안)를 점령한 미 제5해병연대 1개 대대를 시작으로 다음 날인 16일 월미도와 인천항으로 한국군과 유엔군 지원부대들이 차례대로 상륙하면서 북한군 소탕 작전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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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최규봉 전 KLO부대 유격대장으로부터 성조기를 기증받은 맥아더 장군이 1957년 감사의 표시로 보낸 편지.

"당시 북한군은 인천을 주요 공격 지점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해 최소한의 방어 병력만 배치했죠.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북한군의 보급로는 완전히 막혔고 사기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된 북한군은 강계에 임시수도를 두는 등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국군이 전쟁 주도권을 잡으며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대규모 중화인민공화국 군대(중국 인민지원군, 이하 중공군) 개입으로 상황이 급변하죠.

"북한이 열세에 몰리자 소련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중공군은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은 6·25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요. 특히 1950년도 11월 26일부터 17일간 함경남도 개마고원 지역의 인공 저수지인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인해전술을 활용해 미 해병 제1사단을 포위·공격했죠.

"이 과정에서 중공군은 피리 소리를 내면서 돌격했다고 알려졌는데, 그 탓에 국군과 미군은 들리지도 않는 피리 소리로 스트레스를 받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까지 겪었다고 전해져요. 특히 개마고원은 춥기로 유명한데, 11월이면 어땠을까요?" 윤 해설사 질문에 이솔 학생기자가 "엄청 추웠겠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전시된 중공군의 두툼한 복장을 가리키며 "맞아요. 중공군은 개마고원의 추위를 어느 정도 알고 준비했다 하지만, 그래도 혹독한 추위를 피할 순 없었죠. 더불어 우리나라 계절에 대해 잘 몰랐던 미군 또한 한파로 인해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해요. 당시 전투식량을 일일이 녹일 수 없어서 얼음조각이 있는 상태로 먹었고 이로 인해 병사들은 심한 장염과 설사에 시달렸고요. 참여한 군인들이 '이 전투에서 무서웠던 것은 인간이 아닌 혹독한 추위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혹한 대비가 부족했죠"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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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초기,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던 대한민국 공군은 연락기 후방석에서 손으로 폭탄을 던지는 등 힘겹게 싸웠다고 알려졌다.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진 혹독한 추위 속에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대규모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졌는데요.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장진호 전투 중 미 해병 1사단은 전사 700여 명, 부상 및 실종 3500여 명, 동상 환자 3700여 명 등의 피해가 있었어요. 국군 피해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제한적이어서 관련 통계는 찾기 어렵습니다. 한편, 미군보다 6~8배 많은 12만명의 병력을 전투에 투입한 중공군 피해 또한 상당했는데요. 미군 측 추산으로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약 3만6000여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고 전쟁기념관은 중공군 사망자를 4만여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에게는역사상 가장 추운 전투로, 중공군에게는 큰 타격을 입힌 교전으로 기억돼요.

이처럼 중공군 개입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흥남에 고립된 미군과 국군은 1950년 12월 병력 부족과 추위로 더는 전투 불가하다 판단했고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에요. 전시된 배 사진을 가리킨 윤 해설사가 "이 배에 몇 명이나 탑승할 수 있었을까요?"라고 묻자 건우 학생기자가 "3만 명이요"라고 말했어요. 이에 윤 해설사는 "그보다 더 많은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배에 탑승했죠. 피난민들이 항구에 몰려들자 처음엔 미군 측에서 피난민까지 태우고 가기 힘들다고 판단했어요. 그러나 여러 국군 장군들이 설득에 나섰고 결국 피난민을 태우고 함께 철수하기로 했죠. 사진 속 배를 보면 아래 칸이 엄청 크죠? 여기가 원래 무기를 넣는 공간이었는데 무기를 모두 버리고 북한군이 쓰지 못하도록 폭발시켰다고 해요. 그리고 피난민을 싣고 부산으로 떠난 거죠"라고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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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며 주력 항공기로 쓰게 된 'F-51D 머스탱 전투기' 앞에 선 박준후·김이솔·박건우(왼쪽부터) 학생기자.

12월 19일부터 민간인 철수가 시작돼 24일 마지막으로 배가 흥남에서 출발했습니다.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태운 상선들은 목적지인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엄청난 인파가 몰린 부산에서 입항을 거부당해 남쪽으로 더 가서 거제도에서 하선했죠. 그중 12월 23일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도착한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을까요?" 윤 해설사 질문에 준후 학생기자가 "비좁은 곳에 너무 많은 인원이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죠.

"다행히 기쁜 일이 생겼어요. 이 비좁은 배에서 새로운 생명이 5명이나 태어났고, 이분들 중 일부는 여전히 살아 계세요." 이솔 학생기자가 "이때 많은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이산가족이 많아졌다고 들었어요"라고 말했죠. “네, 6·25전쟁 때 북한과 남한으로 흩어져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들은 지금도 서로 연락처나 생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벌써 75년이란 세월이 흘러 연세가 많은 분은 돌아가시기도 했고 점점 주는 추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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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미군 전차대대는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가 중공군에게 공포를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해 M46 패튼에 호랑이 무늬를 칠했다. M46 패튼 앞에 선 소중 학생기자단.

휴전협정 전까지 이어졌던 전투

"6·25전쟁은 끝났을까요?" 윤 해설사 질문에 소중 학생기자단은 "아니요. 휴전 상태에요"라고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맞아요. 우리나라는 70년간 정전 상태입니다. 전쟁을 잠시 멈춘 거지, 끝낸 게 아니에요. 1951년 7월 유엔군 측과 공산 진영은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을 가졌는데, 국경 문제와 포로교환 문제 등에 의견 차이가 커 이를 조율하느라 2년 후인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야 휴전협정이 이뤄졌죠."

휴전을 논의하던 기간에도 양군의 경계선 책정 문제로 각 지역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죠. 그중 대표적인 전투가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군 북방 395고지에서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입니다. 당시 철원군은 인근의 평강군·김화군과 함께 철의 삼각지대 중 한 곳으로 양측의 충돌이 틈틈이 이어졌어요. 백마고지(395고지)는 철원평야를 내려다보는 위치라 철원 일대의 국군 및 유엔군 기지와 보급로를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죠. 이에 중공군이 교착 상황을 타개하고자 백마고지 점령을 시도하면서 10일간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해발고도 395m의 이름 없는 고지를 두고 국군과 중공군이 총력을 기울여 싸웠는데, 여기 스크린에 백마고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죠. 산악지대 능선 때문에 위에서 아래를 내려 봐도 잘 안 보이는 구조라 처음에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직접 돌진하면서 서로를 공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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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 학생기자단이 10일간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던 백마고지 전투 장면을 재연한 전시물을 둘러봤다.

10월 6일부터 9일까지 국군과 중공군이 포격전을 벌이다가 고지 사수를 위해 미군이 항공기를 투입했습니다. 미군은 중공군을 향해 무려 22만 발가량의 포탄을 퍼부었고, 중공군 역시 5만5000발가량 발포하며 합계 총 27만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어요. 그래서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중 단일 최단 포탄 소비 전투로 기록됐죠. “수많은 포탄을 쓴 결과 1m 정도 내려앉았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푸르던 산이 전투 때문에 하얗게 변하면서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그때부터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의 용맹과 국토 수호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입니다.”

중공군 1만4000여 명, 국군 3400여 명이라는 많은 사상자를 낸 백마고지 전투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곡창지대인 북부 철원평야 전체라는 엄청난 땅의 운명이 걸린 전투였기 때문이죠. 만약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이 패했다면 북한군이 철원평야를 계속 침략했을 것이고, 이로 인해 휴전협정도 지연됐을 것이란 추측도 있어요.

이와 더불어 휴전을 앞두고 1953년 6~7월 사이 벌어진 금성 전투 또한 치열한 전투로 알려졌죠.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강원도 철원 지역의 금성 돌출부를 두고 벌인 전투로 휴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양측이 벌인 마지막 대규모 공방전이었어요. 양측 합쳐 4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동원됐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죠. 휴전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양측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어요. 단순한 군사 작전을 넘어 정치적·전략적 목적이 복잡하게 얽혀 발생한 전투였다는 평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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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후·박건우·김이솔(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전선 총반격 성공으로 3개월 만에 서울을 탈환한 국군 모습을 재연한 전시를 보고 있다.

“협정 전까지 각국의 많은 군인이 희생됐는데, 다른 나라는 한국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준후 학생기자 질문에 윤 해설사는 “6·25전쟁은 단순히 남북한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이념 갈등이 불거지며 각기 이념에 따라 여러 나라가 참전하게 된 세계적인 전쟁이었어요.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 등 22개 나라가 유엔군으로 참전했고 지금도 많은 나라가 이 전쟁을 세계 평화를 위한 희생으로 기억하고 있죠”라고 설명했어요.

“아직 우리나라는 휴전 중인데 요즘 사람들은 전쟁의 위협을 잘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아요.” 이솔 학생기자의 우려에 윤 해설사는 “우리나라는 70년 넘게 정전 상태였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전쟁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이 말했듯 우리나라는 여전히 정전 중이고, 북한과의 긴장이 남아있기 때문에 항상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해요”라고 강조했죠.

"앞으로 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나요? 어떻게 막아야 하죠?" 건우 학생기자가 물었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계속 대화를 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또 적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는 강한 국방력도 있어야죠. 무엇보다 전쟁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기억하고,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답니다."
동행취재=김이솔(서울 대곡초 6)·박건우(경기도 판교초 5)·박준후(서울 경인초 6) 학생기자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역사는 좋아하는데, 전쟁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번 취재는 6·25전쟁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죠. 6·25전쟁은 우리나라가 아주 불리한 상태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은 물론 일반 국민과 학생까지 모든 사람이 목숨 걸고 싸웠고 그 결과 우리나라가 이렇게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해설사 선생님께 설명을 듣고 관련 전시를 보면서 깨달은 점은 전쟁은 너무나도 무섭고, 미래에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쟁을 하면 사망자·부상자가 생기고 국토도 황폐해지는 등 안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데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또 남북한 관계도 좋아져서 통일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김이솔(서울 대곡초 6) 학생기자

여러 번 답사했던 전쟁기념관을 소년중앙 기자가 된 후 다시 방문하니 더 의미 있고 뜻깊었습니다. 6·25전쟁실을 해설사 선생님과 함께 둘러보며 한국전쟁의 역사와 여러 유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 소련 최신식 무기를 앞세운 북한이 남침하며 탱크 한 대 없었던 우리 국군이 맞서 싸웠다는 점이 정말 놀랍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호국선열들과 UN 참전 용사분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냈고요. 우리나라는 지금 종전이 아닌 휴전국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하루빨리 남북한이 통일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모든 걸 잃었던 전쟁,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을 기억하고 지금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전쟁기념관, 소중 독자 여러분도 꼭 한번 방문해 보세요.

박건우(경기도 판교초 5) 학생기자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을 주제로 전쟁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전쟁이라 불리는 6·25전쟁은 역사상 슬픈 전쟁 중 하나죠. 전쟁기념관 6·25전쟁 전시실은 두 곳으로 이뤄져 한국전쟁 중에 사용한 무기와 전차 등과 다양한 전투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었죠. 2년 전 한국사검정시험을 준비하면서 6·25전쟁에 대해 공부했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6·25전쟁의 전개 상황, 당시 사용한 무기 종류 등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어요. 6·25전쟁 발발 당시 남한과 북한의 탱크나 군인 수가 엄청 차이 났다는 게 놀라웠죠. 제가 역사와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아 더욱 즐겁고 흥미로운 취재였어요.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 있는 소중 독자들에게 전쟁기념관 방문을 추천합니다.

박준후(서울 경인초 6)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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