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더 세진 상법 개정안에…‘주주 천국’ 될까, ‘펀드 놀이터’ 될까

본문

기업 지배구조를 대주주 중심에서 주주 참여 중심으로 전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이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개정안을 강하게 반대해온 경제계는 법안이 통과된 지 20분 만에 “투기 세력 유입 가능성이 커졌다”며 8개 단체 공동 명의로 유감을 표했다.

17515368277939.jpg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는 가운데 디스플레이에 상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관련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41.21p(1.34%) 오른 3116.27로 마감했다. 연합뉴스

코스피는 올랐는데…재계는 ‘경영 비상등’

이날 입장을 낸 경제단체는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등 8곳이다. 이들은 “법 개정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이사의 소송 방어 수단이 마련되지 못했고 3%룰 강화로 인해 감사위원 선임이 투기 세력에 노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상법 개정은 회사 뿐만이 아니라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까지 명문화했다. ‘전자 주주 총회 강화’ 역시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조항이다. ‘거수기’라는 평가를 받아온 사외이사의 명칭은 ‘독립이사’로 바뀌고 이사회 내 독립이사 비율(자산 1000억원 이상 2조원 미만 기업)이 기존 4분의1에서 3분의1로 넓어진다.

재계의 우려와 달리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코스피지수는 이날 외국인과 기관투자자의 대규모 매수세에 1% 넘게 뛰며 3110선을 회복해 또 한 번 연고점을 경신했다. 주주 권익 확대를 통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감이 반영됐다는 풀이다. “외국인 자금 유입이 예상된다”(하나증권), “지주회사 디스카운트 해소로 연결될 것”(유안타증권) 등 긍정적인 분석도 이어졌다. 한국증권학회장을 지낸 이준성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아 대주주가 사익을 위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며 “이번 개정은 그 기형적 구조를 개선하려는 취지”라고 했다.

17515368280072.jpg

3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는 법 공포 즉시 시행 예정인 만큼 기업들은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우선 상장사 IR(투자자 대응)와 법률 대응 부담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여러 대기업 관계자들은 “주주 제안과 민원이 늘고 단순 질의에도 법률 검토가 필요해 IR이나 로펌·회계법인 자문 비용이 증가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적기에 대규모 자본을 쏟아부어야 하는 반도체나 인공지능(AI) 등 신사업들이 주가에 발목 잡힐 수 있다는 우려도 높았다. 주주 환원 요구에 기업이 과도하게 반응할 경우 중장기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최근 한국은행은 ‘주주 환원 정책이 기업 가치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시설 투자, 연구·개발 등 자본 투자가 필수적인 IT 고성장 산업들은 주주 환원보다는 자본 투자가 기업 가치 제고에 더 효과적”이라고 분석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주가가 상승할 때는 (신산업 투자가) 용납되지만, 떨어지기 시작하면 주주 불만이 빗발칠 것”이라며 “중소·중견기업의 부담이 클 것”이라고 했다.

경제 8단체는 “경영 판단의 원칙을 법에 명확히 규정하고, 배임죄 적용 기준도 보다 합리적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독일처럼 경영 판단의 정당성을 법으로 명문화해 경영진이 선의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경영판단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7515368282034.jpg

상법, 어떻게 바뀌나 그래픽 이미지.

관련기사

  • 주주충실의무 확대에 재계 “경영판단 하나하나 리스크” 우려

‘주주 보호’ 하려다 ‘헤지펀드 놀이터’…남은 불씨는

사내이사인 감사위원뿐만 아니라 사외이사 감사위원 선출 시에도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특수관계인 지분까지 합산해 3%로 제한하는 이른바 ‘강화된 3%룰’ 은 가장 큰 쟁점이다. 한국상사법학회장을 지낸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기형적 입법”이라며 “감사위는 기업 전략과 기밀 정보를 공유하는 핵심 기구인데 행동주의 세력이 유입돼 경영권에 개입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 여전히 후속 입법 과제도 남았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코스피5000특위 위원장)은 “더 센 상법은 진행형”이라며 추가 개정 의지를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3%룰이 강화된 상태에서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확대되면 행동주의 펀드 등 외부 특정 세력이 감사위를 장악하기가 더욱 쉬워진다”며 “행동주의 펀드에 시달리다 상장을 폐지한 기업이 속출한 일본의 사례처럼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4,740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