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화가와 소설가, 두 거장의 30년 우정과 엇갈림, 그리고 마지막 편지[BOOK]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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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교차된 편지들  
폴 세잔, 에밀 졸라 지음
앙리 미테랑 주해
나일민 옮김
소요서가

에밀 졸라(1840~1902)와 폴 세잔(1839~1906)은 엑상프로방스에서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알다시피 졸라는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거장이다. 20권의 ‘루공-마카르 총서'를 순차적으로 출간하며 인기와 존경을 얻었다. 이 총서에는 『목로주점』, 『나나』, 『제르미날』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 많다.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졸라는 1898년 논설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 현실 참여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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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그림 '에스타크에서 바라본 마르세유 만', 1885년경. 책 '교차된 편지들' [사진 소요서가]

한편 화가 세잔은 명성이 비교적 늦게 찾아왔다. 그는 인상파에 속하기는 했으나 중심인물은 아니었다. 고향에서 조용히 작업하던 그가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된 것은 1895년 최초로 개인전이 열린 뒤의 일이다.

『교차된 편지들』은 졸라와 세잔이 약 30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것이다. 저명한 졸라 연구자 앙리 미테랑(1928~2021)이 편찬한 이 책의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여러 책에 흩어져 있던 두 사람의 편지를 최초로 한데 모았다. 둘째, 최근 발견된 세잔의 1887년 편지를 최초로 수록했다. 이것은 마지막 편지이며 중요하다. 셋째, 상세한 주해를 넣어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결과는 생생한 19세기 문화사이다. 권말의 찾아보기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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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사진. 1861년 무렵의 모습이다. [사진 소요서가]

편지는 총 115통으로, 졸라가 쓴 게 31통, 세잔이 84통이다. 1858년부터 1887년까지, 이들이 대략 스무 살부터 쉰 살까지 쓴 것이다. 횟수로 보면 세잔이 더 열렬했던 관계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졸라의 편지는 대신 길다. 많은 편지가 사라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남은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내용은 당연히 젊은 예술가들의 갈망과 좌절에 대한 것들이다. 남자들이 서로에 대한 애착을 편지로 전하는 모습이 처음에 좀 낯설지만(또한 흥미롭다), 읽다 보면 각자의 현안이나 감정이 요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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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이 그린 에밀 졸라의 초상화. [사진 소요서가]

이제까지의 통설은 1886년 졸라의 소설 『작품』 출간과 함께 이들의 우정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소설 속 화가는 천성적 약점 때문에 인생에서도 예술에서도 실패한다. 이 화가의 모델은 세잔이라고 여겨졌다. 이는 좀 곤란한 일이었는데 당시 졸라는 최고 인기 작가였지만 세잔은 시골의 무명 화가였기 때문이다.

졸라가 보내준 『작품』을 받고, 세잔은 정중하고 짤막한 감사 편지를 보냈다. 최근까지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편지로 알려졌다. 세잔은 1902년 졸라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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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11월 28일의 편지. 현재까지 세잔이 졸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로 알려져 있다. [사진 소요서가]

2013년, 세잔이 더 나중에 보낸 편지가 발견됐다. 1887년 졸라의 다음 소설 『대지』를 잘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1886년에 둘의 관계가 끝났다는 견해는 도전받게 되었다. 편자 미테랑은 좀 더 나아간다. “이들의 편지와 만남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희망에 가까운 추측 아닐까. 세잔의 1887년 편지는 사실 1886년 편지와 다르지 않다. 똑같이 책을 보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이다. 1886년 편지가 절교 편지로 해석된 이유는 내용 때문이 아니다. 후속 편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이제 마지막 편지가 된 1887년 편지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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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그림 '에밀 졸라에세 책을 읽어주는 폴 알렉시', 1869~1871년경. [사진 소요서가]

이처럼 짤막하고 정중한 편지로 끝나는 우정이 드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졸라는 세잔의 기분을 알았고,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로 계속 자기 책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세잔의 감사 편지는 요즘 같으면 문자로 해도 될 분량이다. 나쁜 말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졸라가 바랐던 답장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스물한 살 때 세잔은 졸라에게 편지를 썼다. “걱정하지 마. 네가 맞아… 결론은 우린 여전히 좋은 친구라는 거야.”(211쪽) 오직 이런 편지만이 그들의 우정을 구했을 것이고, 세잔도 졸라도 그걸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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