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美에 투자하랄 땐 언제고…투자기업 쑥대밭 만든 트럼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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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 대로’를 지나면 ‘기아 대로’가 나오고, 오른쪽 편으로 ‘LG 대로’ 표지판이 보였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 이민당국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쑥대밭이 된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으로 가는 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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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간 6일 미국 조지아주 서배나에 위치한 '메타플랜트' 복합단지에 '기아 대로'와 'LG 대로'로 적힌 표지판이 서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4일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장 공장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벌여 한국인 300여명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했다. 서배나=강태화 특파원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한·미 투자의 대표적 사례로 꼽혔던 거대한 ‘메타플랜트’ 복합단지에 장갑차를 동원한 체포 작전을 펼쳐 475명을 검거했다. 관세를 무기로 내세워 대미 투자를 압박해왔던 트럼프 대통령이 오히려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기업을 공격한 셈이다.

수색 영장엔 4명…트럼프 “할 일을 한 것”

이번 체포 작전의 법적 근거는 조지아 연방 남부법원이 발부한 수색영장이다. 당초 영장에 적시된 체포 대상은 히스페닉계 범죄 용의자 4명이었다. 그런데 수사 당국은 헬기와 장갑차를 비롯해 수백명의 요원을 투입해 전 직원을 전수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단일 사건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인 475명이 체포됐다. 이중 한국인 직원은 300여명에 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체포 작전 직후 관련 질문을 받자 “방금 전에 (단속 관련) 소식을 들었다”면서도 “그들은 불법 체류자였고, 이민단속국(ICE)은 그저 제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공장에 대한 체포가 진행됐던 4일은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15%로 낮추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한 날이다. 일본은 자동차 관세를 기존의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투자와 관련 ‘미국이 투자처를 결정한다’는 내용을 적시하는 데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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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간 6일 미국 조지아주 서배나에 위치한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가동이 멈춰서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해당 공장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벌여 한국인 300여명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했다. 서배나=강태화 특파원

반면 한국은 관세 인하의 조건으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지만, 정상회담을 거치고도 구체적인 자금 조달 방안과 투자 시기에 대한 문서화를 마무리하지 않으면서 25%의 자동차 관세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바이든의 치적…‘스윙 스테이트’ 노렸나

트럼프 행정부의 공격을 받은 배터리 공장은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던 2022년 5월 건립 계획이 발표됐던 곳이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그해 10월 공장 기공식 때 성명을 통해 ”나의 경제정책이 조지아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며 투자 유치를 대표적 성과로 내세웠다.

특히 공장이 위치한 조지아주는 2020년 대선 때는 바이든 전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했던 대표적 경합주다.

민주당 소속인 샘 박 조지아주 하원의원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단속에는 정치적 동기가 있는 공격”이라며 “청정에너지의 미래를 건설하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중간선거를 노린 정치적 행위라는 주장이다.

실제 중앙일보가 6일 한국인 근로자들이 구금된 포크스턴에 위치한 교정시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 트럼프 지지자는 트랙터를 몰고와 “한국이 약속한 투자는 미국인이 아닌 불법 체류 한국인들을 고용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며 취재진을 위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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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간 6일 중앙일보 취재진이 한국인 근로자들이 구금돼 있는 미국 조지아주의 구금 시설에서 취재를 진행하자, 한 트럼프 지지자가 트랙터를 몰고와 ″한국은 미국인을 고용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취재진을 위협한 뒤 돌아가고 있다. 포크스턴=강태화 특파원

이민자 추방 정책이 트럼프 대통령의 강성 지지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쉬쉬’ 해왔던 관행…“다른 기업도 예외 아니다”

미국에 진출한 기업 관계자는 “현지 투자를 결정한 기업의 입장에선 신속한 공장 준공이 필수적인데 대부분 오지에 건설되는 현지 공장 주변에선 한국 설비를 설치할 인력조차 구할 수 없다”며 “이 때문에 공장 건설 과정에서 긴급히 투입되는 전문인력에 대해선 미국 정부도 전자여행허가(ESTA)나 단기 상용(B-1) 비자 등을 활용해온 것을 묵인해왔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번 단속은 연말까지 불법 체류자 추방 목표를 채우기 위한 당국의 의도가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내년 선거를 앞둔 정치적 상황에 따라 피해 대상은 언제든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현지 구금 시설을 찾은 조기중 워싱턴 총영사는 ‘묵인했던 관행을 단속했다’는 지적과 관련 “이와 관련해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과 별도 간담회를 통해 상황을 공유했다”며 “이번 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 것이 향후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동만 전 필리핀 대사는 “현재 멕시코와 캐나다는 전문직 비자(E-4)를 무제한으로 받고 있고 호주는 1만 500명, 싱가포르는 5400명에 달한다”며 “전문직비자 신설을 한국이 장기적으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라고 조언했다. 한국은 2006~2007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당시 전문직 비자 신설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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