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춘재 9차 살인사건 누명’ 故 윤동일씨…33년만에 무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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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 뉴스1
“이 사건 재심 판결을 통해 고인이 된 피고인이 명예를 회복하고, 많은 고통을 받았을 피고인들의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피고인은 무죄.”
30일 오후 이춘재 연쇄살인 9차 사건의 범인 등으로 몰려 옥살이한 뒤 병으로 숨진 고(故) 윤동일씨에게 재심에서 33년 만에 무죄가 선고되자 피고인석에 대신 앉은 형 윤동기(62)씨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동기씨는 “울컥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참았다”며 “오늘 무죄 선고가 나왔으니 동생도 떳떳하고 홀가분한 마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추행범으로 누명 쓴 모범생 동생
윤동일씨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1990년 11월이다. 인근 다른 동네에서 10대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뒤 숨진, 이른바 ‘이춘재 9차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윤씨 집 인근에 사는 A씨가 강제추행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형사들은 동일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수갑을 채웠다. 이후 잠 안 재우기, 뺨 맞기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경찰은 A씨 추행 사건은 물론 이춘재 9차 연쇄살인 사건도 동일씨의 범죄로 몰아갔다. 다행히 9차 사건 피해자 교복에서 채취된 정액과 동일씨의 혈액 감정 결과 불일치하면서 살인 혐의는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A씨에 대한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1991년 기소된 그는 그해 4월 23일 수원지법으로부터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해 상소했으나 모두 기각돼 1992년 1심 판결이 확정됐다.
동일씨는 이 사건으로 몇 달간 옥살이했다. 집행유예 선고로 출소했지만 삶은 무너졌다. 밖을 나서면 경찰이 동향 파악을 이유로 감시했다. 주변의 눈초리도 따가웠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결국 만 26살이던 1997년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이춘재 연쇄살인 용의자로 몰렸던 고(故)윤동일씨의 친형(오른쪽에서 두번째)이 30일 재심 재판 선고 직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재판에는 이춘재 8차 사건 용의자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왼쪽)도 방청했다. 최모란 기자
동기씨에게 동생 동일씨의 사건은 평생 한(恨)이었다. 동기씨는 지난달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생은 학교 다닐 때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살인사건 용의자가 됐다”며 “당시 변호사를 선임해 현장검증 장소를 찾아갔는데 동일이가 ‘난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 했다. 동기씨는 2019년 9월 이춘재가 붙잡히고 진실화해위원회가 2022년 12월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불법체포·가혹 행위·자백 강요·증거 조작 및 은폐 등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다”고 밝히자 재심을 청구했다.
유죄 확정판결 33년 만에 무죄
수원지법 형사15부(정윤섭 부장판사)는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한 직접 증거는 피고인의 자백 진술, 법정 진술 등”이라며 “경찰의 자백 진술은 불법구금, 강압수사로 인한 것으로 의심할 만하고, 저지르지 않은 다른 범죄사실에 대해서도 자백 진술한 점에 비춰보면 이는 신빙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또 “법정 진술 역시 신빙성이 없는 등 이 사건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어 범죄사실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검찰도 지난달 9일 동일씨에게 무죄를 구형하면서 “오랜 시간 불명예를 안고 지낸 피고인과 그 가족에게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동일씨 유가족은 2023년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5억여원의 손해배상 청구도 제기한 상태다.

이춘재 연쇄살인 용의자로 몰렸던 고(故)윤동일씨의 친형(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30일 재심 재판 선고 직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재판에는 이춘재 8차 사건 용의자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던 장동익씨(오른쪽 맨 끝)도 참석했다. 최모란 기자
형 동기씨는“최종 무죄가 나와서 마음이 좋다”며 “2년 동안 고생한 변호사님과 무죄를 선고해준 판사·검사, 언론 등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날 선고 공판은 이춘재 8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58)씨와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장동익(70)씨도 방청했다. 이들은 형 동기씨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했다. 윤성여씨는 “명예가 회복돼 이 분(동일씨)도 하늘나라에서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동익씨도 “공권력의 고문·가혹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일씨의 재심 사건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오늘 무죄판결은 돌아가신 윤동일씨의 명예를 되찾는 판결”이라며 “앞으로 수사과정의 절차가 좀 더 약자를 배려하고 인권적으로 진행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상조사 결과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피해를 본 이들이 20명인데 2명(윤성여, 윤동일)만 재심을 신청했다”며 “피해자가 국가로부터 큰 피해를 본 분들이 충분히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 행사를 못 하는 여러 사정이 안타깝다. 다른 피해자분들이 계신다면 도움을 받아 국가로부터 위로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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