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 악문 장동혁, 웃는 한동훈…8개월전 이 장면, 운명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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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1일 당시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이 국민의힘 당대표실을 나가는 사이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가 미소를 짓고 있다. 사흘 뒤 장 의원은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며 한동훈 대표 체제의 붕괴를 이끌었다. 연합뉴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찬반을 놓고 국민의힘이 극심한 내부 갈등을 겪던 지난해 12월 11일. 이를 악물고 국민의힘 대표실을 나가는 장동혁 의원과 떠나는 그를 바라보며 방긋 웃는 한동훈 전 대표의 모습은 한 배를 탔던 두 사람의 정치 인생을 갈라 놓는 변곡점이었다.
친한계 핵심으로 불리던 장 의원은 이날 당시 당을 이끌던 한 전 대표의 ‘윤 전 대통령 탄핵 로드맵’에 공개 반대했다. 사흘 뒤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장 의원은 책임의 표시로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한 전 대표와 러닝메이트로 전당대회에 출마해 지도보의 일원이 됐던 장 의원이 먼저 직을 던지자 나머지 최고위원도 줄사퇴를 했고, 한동훈 체제는 결국 붕괴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미소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국민의힘 6차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장동혁 신임 대표가 26일 당선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 내 국민의힘 당 대표 회의실로 향하다 미소짓고 있다. 2025.8.26 xxxxxxxxxxxxxxxxx (끝)〈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그로부터 약 8개월이 흐른 26일 장동혁 의원은 국민의힘의 새 대표가 됐다. 굳은 표정의 과거와 달리 웃으며 대표실로 입성한 그는 반한계 핵심 인사로 변모해 있었고,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탄핵 반대에 앞장서 ‘반탄’ 대표 주자로 올라서 있었다.
그는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집회는 물론 세이브코리아 집회에 참석해 “계엄은 반국가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라는 시대적 명령”이라고 외쳤다.
6·3 대선 과정에서도 그의 행보는 심상치 않았다. 경선 과정에서 김문수 후보 캠프의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 운동을 진두지휘했지만, 김 후보가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의 단일화 갈등 끝에 최종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당 사무총장을 제안하자 그는 고사했다. “나는 단일화를 하려고 이 캠프에 왔다”는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석 달 뒤 국민의힘 전당대회 결선에서 맞붙게 됐고, 결과는 ‘더 강경한’ 장 대표의 승리였다.
장 대표에 대한 국민의힘 내부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보수의 젊고 유능한 새 지도자”(옛 친윤계 의원)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야망이 불타올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친한계 인사)이란 평가가 공존한다.

국민의힘 장동혁 신임 당대표가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제6차 전당대회 결선에서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친한계 핵심으로 불릴 때도 “나는 친한계 장동혁이 아니라 정치인 장동혁”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장 대표와 달리, 친한계는 “오늘날의 ‘장동혁 대표’가 있기까지 ‘친한계 핵심 장동혁’이 디딤돌이 됐다”고 본다. 김태흠 충남지사의 지방선거 출마로 공석이 된 충남 보령·서천에서 2022년 보궐선거로 당선된 그가 2023년 12월 ‘한동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에서 사무총장을 맡은 게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놨다는 이유다. 당의 살림을 챙기고, 더군다나 22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에 ‘0.5선’ 장 대표의 발탁은 실제로 파격적이었다. 통상 3선 이상이 맡는 자리였지만 당내 기반이 없던 한동훈 전 대표가 그를 깜짝 발탁했고, 그때부터 정치인 장동혁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전당대회 과정에서 친한계를 겨냥해 “내부총질을 하는 배신자”라고 외치는 장 대표에 대해 친한계는 “배신자는 장동혁 본인 아니냐”고 받아치곤 했다.
장 대표의 인생 궤적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급식 먹을 돈이 없어 점심시간마다 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유복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서울대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199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교육부 행정사무관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법조인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고, 다시 고시생 신분으로 돌아가 결국 행정고시 합격 10년 만에 사법시험(사법연수원 33기)에 합격해 ‘양시 합격’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판사에 임용돼 법복을 입은 그는 대전지법 판사와 광주지법 부장판사를 지냈고 변호사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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